선교 120돌 ...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서서

posted Feb 24, 202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마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류제한 박사, 메 에임스 류 여사, 제넷 오벅 맥기 여사의 추모비가 나란히 서 있다.

 

설 명절 연휴를 앞두고 서울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았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가 을씨년스러웠지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뭔지 모를 감정이 마음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이곳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선교사와 그 가족 145명이 안장돼 있습니다. 

 

‘한국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는 헐버트 선교사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해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된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하디 선교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억눌린 한국인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언론인 베델 선교사 등 당시 세상의 변방이던 ‘코리아’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 헌신했던 이들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재림교인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F구역 41번부터 43번까지 류제한 박사와 그의 아내 메 에임스 류 여사 그리고 제넷 오벅 맥기 여사의 추모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이자 위생병원(현 삼육병원)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유명한 류제한(Dr. George Henry Rue: 1889-1993) 박사는 초기 한국선교 당시 의료선교사로 크게 헌신했던 인물입니다. 현재의 묘소는 지난 2004년 한국선교 100주년기념 유적사업의 일환으로 묘비를 세워 조성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을 진료할 때나 시골 아낙네를 진료할 때나 똑같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진료했습니다” “나는 한국에 구경삼아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나의 뼈를 묻을 각오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리가 한국 백성을 해치러 온다면 도망가는 목자가 아니라 그 양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온 선교사였습니다”라는 말에 그가 얼마나 숭고한 정신으로 한국인을 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7ca7d3d330138ccbe292e487766c1bec_1707466567_576.png
 

그 옆에는 부인 메 에임스 류(Mae Ames Rue: 1900-1936) 여사의 묘가 있습니다. 그녀는 류제한 박사가 태평양연합대학(PUC)을 졸업하고, 로마린다대학에 입학한 이듬해인 1921년 6월 19일 결혼했습니다. 이후 남편이 한국의 의료선교사로 부름 받자 함께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1929년 5월의 일입니다. 

 

하지만 순안병원뿐 아니라 소공동과 인사동, 현재의 휘경동 자리에 병원을 신축하는 등 의료사업이 한창 궤도에 오를 즈음, 신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그 후유증으로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에 이역만리 타국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신혼의 단꿈을 접고 한국에 온 지 7년 만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묻힌 외국인선교사는 그녀가 유일합니다. 

 

그 옆에는 제넷 오벅 맥기(Jeanette Oberg Mcghee: 1918-1995) 여사의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그는 한국 재림교회의 기반을 닦은 오벽(H.A. Oberg: 1909-1939) 목사의 딸입니다. 1918년 순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오벽 목사는 1908년 11월 한국에 와 1939년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의명학교 교사, 삼육대학장, 시조사 편집국장, 조선합회장 등을 역임하며 초기 한국선교의 기틀을 놓았습니다. 

 

이 비석은 2001년부터 4년 동안 북아태지회 선교부장으로 봉사했던 존 맥기 목사가 자신의 어머니인 제넷 오벅 맥기 여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존 맥기 목사는 오벽 목사의 외손자입니다.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어머니의 분골을 한국으로 옮겨와 2004년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한국선교가 어느덧 120년을 맞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외국인선교사 묘역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욱 엄숙해집니다. 미지의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파란눈의 한국인’이 된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고마움도 있고, 미안함도 있고, 애틋한 감정도 묻어납니다. 이들의 삶이 한국 교회에 남긴 의미를 되새깁니다. 

 

우산을 걷어 묘원을 나서는 길, 어디선가 이런 물음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너는 이들처럼 헌신하느냐?’ 

‘너는 이들처럼 너의 민족을 사랑하느냐?’

‘너는 이들처럼 할 수 있으냐? 아니, 하고 있느냐? ... ...’

 

- 자료 출처 : 재림마을


Articles

1 2 3 4 5 6 7 8